오늘을 가장 즐겁게 사는법
물 위를 걷는 삶 본문
반응형
하나님과 친밀한 교재를 나누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님을 느끼고 알게됨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된것과 같은 것이자 모든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또한 가지게 되었으며 기적이 더 이상 특별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지속하고 싶었고 더 나아가 발전하고 싶었다.
하나님의 임재와 기적이 떠나지 않는 삶을 원했고 그것을 나는 "칼날 위를 걷는 삶"이라고 표현하며 기도 했다. 하나님의 임재의 삶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의 임재를 떠난 삶은 칼날에 잘려 나간 죽음과도 같은 것이라 여겼다. 하나님의 방향을 알지 못할 때의 나는 어둡고 깊은 물속에 빠져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방향을 구분할 수 없는 숨막히는 상황에 처한것과 다름 없다고 느꼈다.
그러던 내가 체험에 심취해 기적에 심취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게되고 예수님이 아닌 주위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다. 숨을 쉴 수 없어 내 영혼은 고통스러워 했고 더 이상 칼날 위의 기적은 사라져 내 발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내 영혼은 죽은 것과 다름 없게 되었다.
그 후 오랜시간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노력을 했다. 이전의 만남을 생각하며 이전의 경험을 생각하며 이전의 방법을 생각하며 다시금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불가능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이전의 삶에 머물기를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계회복의 방법 또한 옳지 않았음을 알고나서야 진정한 회복, 나아가 회복 이후의 관계의 발전을 맛보게 되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는 나의 경험과 나의 노력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적을 체험하며 함께 보낸 시간조차 관계회복에 일말의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마7:22-4에서 친히 말씀하셨다.
얼마전 말씀을 통해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로 뛰어든 베드로를 보았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체험까지한 베드로였지만 주위를 둘러보다 기적의 자리에서 믿음의 자리에서 멀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런 베드로를 통해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칼날 위를 걷는 삶" 그것은 "물 위를 걷는 삶"과 결국 같은 의미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삶에 대해 베드로의 경험을 통해 미리 말씀하고 계셨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마14:31" 기적을 바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회복을 바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 믿음이 작았던 것이다. 완악했던 것이다. 이런 나를 두고 예수님은 다시 한번 말씀 하신다.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마17:17" 관계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회복시켜 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다만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완악하고 어리석은 내 마음이 그 회복의 자리를 외면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었다. 유일하신 신께서 하나뿐인 당신의 아들을 가장 싫어하는 죄악에 찌든 인간에게 왕으로 주시되 인간과 같은 모양으로 인간의 삶의 무게를 친히 짊어지게 하시고 죽음과 부활로 그 모든 권세를 가지게 하셨으니 그 헤아릴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사랑을 느끼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 나의 마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켜주신 증거이다. 그 증거가 있음에도 나의 믿음은 나의 사랑은 기적과 체험에만 머문 보잘것 없이 작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회복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며 천국을 선물로 가지고 오셨기 때문이다. 말그대로 천국이 내 곁에 가까이 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기 시작할 때 부터 그 것은 내 것이 되었다. 그 사랑을 붙들 때부터 나의 회복은 시작되었다.
가히 평강의 왕이라 불리기 합당한 예수님이시다. 벌을 받아 죽어 마땅한 나를 자신의 죽음으로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 죄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구해 주셨으니 이것은 사랑하는 자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룬 위대한 사실이자 증명인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구차하게 회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만을 바라보고 그 사랑에 의지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다. "물 위를 걷는 삶" 그 것은 기적의 이야기가 아닌 믿음과 사랑의 이야기라는 작은 깨달음으로 이 글을 맺으려 한다.
Comments